07/18/23 사 24~26장, "26장 구원의 성곽" > 묵상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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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7/18/23 사 24~26장, "26장 구원의 성곽" Publish on July 19,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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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52회 작성일 23-07-1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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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사 24-26장을 묵상할 차례인데요.

그중에, 26장을 중심으로 묵상하겠습니다.


구약은 분량이 많습니다.

그래서 읽을 때, “흐름(문맥)을 잡으면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맥을 이해하면, 큰 그림을 그리면서 읽어 나갈 수 있고, 내용을 이해하기도 더 쉬워집 니다.


어제까지 13~23장에서는 열방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나왔습니다.

오늘 읽을 24장에서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현현하셔서, Theophany) 이 땅을 심판하시는 장면 이 계속됩니다.

심판하실 때, 열방의 왕들을 벌하시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 니다 (24:21-23).


25장은 그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25:1).

하나님이 시온 산에서 연회를 베푸시는데요(25:6).

주목할 것은 이것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잔치가 아니라, 만민을 위한 잔치입니다. 

그 산에서 열방의 얼굴 덮개를 제하시고, 서로 마주 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겨주십니다.

(그리고 모압을 심판하는 예언이 나옵니다.)


26장에서는 유다가 1절부터 구원의 노래를 부릅니다.

“(사 26:1)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이 성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는데, 여호와의 구원이 성과 곽이라고 합니다.

* 성은 성벽, 즉 내성을 말하고, 

* 곽은 주로 외벽이나 방어벽, 즉 외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과 곽이란 말은 성벽과 방어벽(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이중성벽이란 말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구원”이 성벽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돌이나 벽돌로 성벽을 쌓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돌이나 벽돌은 눈에 보이는 물질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잖아요?

즉, 이 성벽은 눈에 보이는 성벽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성벽이 존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벽, “투명 성벽”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벽 안에서 사는 모습을 애니메이션처럼 상상해 봅니다.

산꼭대기에 도시가 있습니다.

적들이 쳐들어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별로 동요치 않습니다.

적들이 가까이 왔는데, 알고 보니 “투명 성벽”이 도시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벽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벽을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머리를 쓰고 벽돌을 구워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투명 성벽의 존재를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쌓은 성벽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가 성벽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성곽을 믿고 살지 않고, 여호와가 성곽임을 믿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성벽이라는 말씀은 창세기 15장을 생각나게 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기를,

“(창 15:1)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고,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후환이 두려웠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아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주겠다”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창 15:6).

이것을 이사야 버전으로 바꾸면,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나의 구원의 성벽임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곽, 구원의 성곽에 누가 들어옵니까?

1) “(사 26:2)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찌어다.”

신은 한문으로 “믿을 신”입니다.

차라리 믿음이라고 번역했으면 읽기 편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드는 번역입니다.

너무 옛날식 표현인거죠. ^^;;

그래서 개역개정판은 신의라고 번역했습니다.

(참고로, 히브리어를 번역할 때, faith(믿음)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faithfulness(충성스러움) 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믿음과 충성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결과물이 충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믿으면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신앙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충실하게 헌신하는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 니다.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구원의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2) “(사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 구원의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 아니고, 팔랑귀처럼 이말 저말에 혹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를 신실하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평소에도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심지가 굳은 사람입니다.


저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내가 형편이 좋을 땐 내 힘으로 사는 것처럼 목에 힘주고 살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제야 “주님, 도와주세요.”하진 않는지….

심지가 굳은 것을 완고하고, 남의 말 안 듣고, 똥고집 부리는 것으로 착각하진 않는지….


혹시 제가 팔랑귀는 아닌지 돌아봅니다.

반대로, 제게 쓸데없는 고집은 없는지도 돌아봅니다.

오늘 저의 인간적인 모습을 내려놓고, 저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3) “(사 26:8)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사 26: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8, 9절은 “주를 기다리고 사모한다”는 고백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 구원의 성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냐 하면, “심판의 상황에서도, 재앙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더욱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범죄함으로 이렇게 되었나이다.” 하며 회개합니다.

“징계 후에라도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혹시 저는 좋은 땐 감사하다가, 나빠지면 원망하는 사람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일편단심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사모하고, 주님만 믿기 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에서 주를 바라보고, 주님의 구원을 기대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고 싶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주님을 믿고, 찬양하기로 제 마음을 확정하기 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pa_vptcy7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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