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7/23 사 49~51장, “49장 두 번째 종의 노래” Publish on July 27,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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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49장을 묵상하겠습니다.
49장은 두 번째 종의 노래라고 불립니다.
이사야서에는 종의 노래가 네 번 나오는데요.
1) 종의 노래1은 하나님의 종이 이스라엘과 이방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사 42:1-4).
2) 종의 노래2는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이방에게 빛을 비출 사면을 받았다(사 49:1-6).
3) 종의 노래3은 하나님이 그의 종에게 원수의 공격에 견딜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사 50:4-9).
4) 종의 노래4는 하나님의 종은 사람들을 대속하기 위해 모욕과 멸시와 고통을 감내하는 고난의 종이다(사 52:13-53:12).
1. 나를 들으라
두 번째 종의 노래는 종이 “나를 들으라”라고 노래를 시작합니다.
“내게 들으라.” 또는 “내가 하는 말을 들으라”라는 뜻입니다.
이 문구는 주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실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자신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며 노래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태에서 나를 부르셨다”라고 하여, 그가 사람임도 밝힙니다.
(예수님이 인성과 신성을 함께 지닌 분이란 것을 이미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 종의 사역은 주로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활동합니다.
칼, 활, 화살통같은 군사적 용어는 이 종의 말씀이 얼마나 예리하고, 날카로울지를 잘 보여 줍니다.
2. 이스라엘 (메시아의 다른 이름)
3절은 종의 정체(identity)를 보여줍니다.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정체에 대해 논란이 있습니다.
*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주장합니다. (억지입니다.)
*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메시아”라고 해석합니다.
예를 들어, 5절에서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라고 하는데요.
그를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면, “야곱(이스라엘)을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에게로 모인다” 가 됩니다. 말이 안 됩니다.
반대로, “메시아 개인”이라고 해석하면, 자연스럽게 해석이 됩니다.
3. 사역의 어려움
그런데, 신적 능력을 갖춘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는데, 그의 사역은 만만치 않습니다.
마치 헛수고인 것처럼 보입니다.
“(사 49:4)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라고 한탄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힘껏 일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고, 피곤해서 머리만 붙이면 주무실 정도였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보시며 가슴아파 하기도 하셨고, 기적과 축사와 치유의 사역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힘이 빠지고, 헛수고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다시 힘을 냅니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음을 상기합니다.
“신원”은 폭이 해석의 폭이 넓은 단어입니다.
번역본에 따라 “판단(개역개정)”이나, “심판(표준새번역)”, “judgment(재판, KJV)”, “cause (소송, NRSV)” 등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단어는 달라도 뜻은 비슷합니다.
재판해서 심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단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것이 핵심입니다.
저의 사역을 예수님의 사역에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저에게 적용하게 됩니다.
저도 사역하다 보면,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대했는데, 진심을 몰라주거나 악의적인 대응을 받을 때도 있고,
나는 힘껏 일했는데, 결과가 미미할 때도 있고,
구석에서, 뒤에서 성심껏 일했는데, 무시당할 때도 있습니다.
가끔은 힘이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도 그랬는데….’ 하는 생각을 하니, 저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판단이 최종적인 판단임을 다시 생각합니다.
오늘 다시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심판하고 보상해 주신다는 생각을 하니, 다시 힘이 납니다.
4. 메시아의 사명
(사 49:5)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6절에서 하나님은 메시아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이 사명은 이중적입니다.
1) 그는 “야곱(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는 사명”이 있을 뿐 아니라,
2) 동시에 “이방의 빛이 되는 사명”도 있습니다.
이방의 빛이란 사명은 이사야 42:6절에 나왔었는데, 사 49:6에서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어둠 속에서 고통당하는 이방에게 빛을 발하고,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하는 사명을 받은 분입니다.
이방에 관한 관심은 이미 1절부터 표현되어 있습니다.
1절은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 하면서, 이방을 부르면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교적인 하나님이신지 봅니다.
열방을 품고 계신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이방의 빛 되신 메시아, 선교적인 메시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실제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찬양했습니다(눅 2:32).
5. 우리의 사명
그런데 독특한 것은 이 구절이 메시아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여행 중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의 선교팀도 이방의 빛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행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인칭의 변화입니다.
바울이 이사야 49장을 인용하고 있는데요.
* 이사야는 “내가 너(2인칭 단수형)를”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너”는 분명히 메시아 개인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 그런데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우리(1인칭 복수형)를 명하시되”라고 말합니다.
바울 자신을 비롯한 선교팀원들 모두를 “너”에 적용시킵니다. 즉 “내(하나님)가 너희들(바울 선교팀)을 이방의 빛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방의 빛은 단지 메시아(예수님)만의 사명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사명이라는 논리입니다.
단지 바울만의 사명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의 사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요즘 선교에 대한 부담감을 느낍니다.
팬데믹 이후에, 선교 활동이 많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는 위축되지 않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성품이요 본성입니다.
하나님을 닮기 원하는 자는 누구든 자연스럽게 선교하는 하나님을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열방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가슴을 닮고 싶습니다.
저도 주님처럼, 바울처럼 이방의 빛이 되는 사명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현지 사역이 활성화되도록 지원하고, 교회의 선교 사역도 다시 활기를 찾도록 애쓰길 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fL21wL-h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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