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6/23 대상 10~16장, “오벧에돔” Publish on April 16,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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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대상 13장을 묵상하겠습니다.
언약궤를 옮기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웃사와 오벧에돔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참 다릅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해 묵상해 보겠습니다.
1. 베레스 웃사
이야기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하고,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승전한 뒤에,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에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상의 머리와 손목을 부러뜨리셨고, 그 후로도 옮기는 곳마다 재앙이 발생하게 하셨습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패하고 패전했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는 승전하였습니다.
어미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 벧세메스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 70명이 감히 법궤를 들여다보다가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있는 레위인 아비나답의 집에 맡겨졌습니다.
“(삼상 7: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삼상 7: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법궤가 기럇여아림에서 20년을 머물렀습니다.
당시에 왕이 사울이었잖아요?
그런데 사울은 믿음에 관심이 없던 왕이었잖아요.
그러니 법궤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20년 세월이 흘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후에,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상당히 축제 분위기 속에서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남쪽으로는 애굽의 시홀 시내부터 북쪽으로는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았습니다.
뽑은 군사만 해도 3만 명이 모였습니다(삼하 6;1).
그런데 여기에서 불행이 시작됩니다.
두 가지 잘못이 나옵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오게 합니다.
그런데 언약궤는 수레에 실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레위 지파가 채를 고리에 꿰어 어깨에 메고 운반하도록 하셨습니다.
법궤 운반을 맡은 고핫 자손이라 할지라도, 지성물을 함부로 만지면 죽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민 4:15-20).
광야 40년 동안 이 방법으로 운반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2) 그동안 법궤를 모셨던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운반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아비나답이 레위인 이니까, 웃사도 레위인 입니다.
자기 집에 20년간 법궤가 있었으니, 어릴 때부터 법궤를 보며 자랐을 것입니다.
또한 언약궤를 옮기는 것이 레위인의 직무이니, 그것에 관한 규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어기고 수레에 싣고 운반했습니다.
소들이 뛰어서 법궤가 흔들리자, 웃사가 손으로 궤를 붙들었습니다.
떨어지는 법궤를 붙잡은 것은 하나님을 위한 동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를 범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 때문에,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함을 자기 손으로 더럽힌 것입니다.
법궤의 거룩함을 손상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잊어버렸습니다.
자기 집에 오래 있다 보니, 익숙해졌고, 법궤를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결국 법궤의 거룩성을 침범한 웃사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독종으로 재앙 당했던 블레셋 사람들이나, 법궤 안을 들여다보다가 죽임당한 70명의 벧세메스 사람들이나 비슷한 결과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법궤 운반 프로젝트는 “베레스 웃사(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심)”로 결론 나고 말았습니다(대상 13:11).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익숙함 때문에, 웃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또한 목적과 의도가 선하다 하더라도, 불법적인 방법이 용인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다시 배웁니다.
법궤를 집안에 안치했던 아비나답은 20년 동안 무엇을 했던 것일까요?
그냥 허송세월했습니다.
그래서 축복은커녕 재앙의 결과를 맞고 말았습니다.
웃사에게 법궤의 의미와 거룩성을 가르치고,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제대로 가르쳤다면, 웃사의 결말은 달랐을 텐데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아비나답처럼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해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익숙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무시하고 있진 않은지 다시 점검해 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교회 일 할 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하기 원합니다.
2. 오벧에돔
상황이 이렇게 되니, 누가 선뜻 법궤를 가져오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맡겨졌습니다.
“(대상 13:13) (다윗이)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 메어 들이지 못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가니라.”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정도 체류했는데요.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오벧에돔 집이 법궤로 말미암아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대상 13: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그래서 다윗이 다시 용기를 내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때는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제대로 된 방식으로 모셔갑니다.)
아비나답 집안과 오벧에돔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비나답 집안과 오벧에돔은 둘 다 법궤를 섬기는 영광스러운 일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자기 집안에 모시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아비나답 집안은 수십 년이나 언약궤를 맡았는데도 복 받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들 웃사가 죽는 슬픔을 당합니다.
그에 반해, 오벧에돔은 겨우 석 달을 모셨지만, 하나님이 그의 집에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성경에 보면, 아비나답 집에서는 집안에 여호와의 궤를 들여놓고, 궤를 지켰다고 했습니다(삼상 7:1).
그러나 오벧에돔 집에서는 가족과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대상 13:14).
지키고 있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은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어쩌면 아비나답은 언약궤를 집안에 들여놓고 지키기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을지 모르지만, 경외함도 없고, 하나님과 친밀함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에서 마치 가족처럼 함께 계셨습니다.
비록 3개월이었지만, 오벧에돔 가족들은 하나님을 가족의 일원처럼 친밀하게 대했습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과 함께 거했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성소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친밀하게 다가오길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 하나님도 친밀하신 하나님입니다.
“(시 25: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저도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기 원합니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기 원합니다.
특히 오벧에돔처럼 온 가족이 하나님과 친밀해져야겠습니다.
가정예배가 중요함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일에 더 힘을 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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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오벧에돔은 누구일까요?
오벧에돔의 정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요.
1) 레위인
가드 사람을 “가드 림몬” 사람의 줄임말로 보는 견해입니다.
가드 림몬은 지중해 해변 쪽에 있는 므낫세와 단지파의 경계지역인데요. 레위인, 특히 고핫 자손의 거주지역입니다(수 21:25, 대상 6:69).
즉, 그가 가드 림몬 사람이라면, 레위 지파 고핫 자손이란 말입니다.
고핫 자손은 법궤를 모실 자격이 있고, 법궤에 대한 지식도 있으므로, 이 레위인이 법궤를 맡았다는 의견입니다.
역대기에는 오벧에돔이 수금 타는 레위인과 문 지키는 레위인 명단에도 나옵니다.
그러니 오벧에돔은 레위인이라고 추측하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 견해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에벧에돔은 후대의 레위인 족보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데요.
오벧에돔이 전혀 신앙적인 이름이 아닙니다.
뜻을 보면, “오벧”은 종(섬기는 자)이고, “에돔”은 에서의 후손인 에돔 나라입니다.
즉, 에돔의 종, 에돔을 섬기는 자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특히 레위인이 이런 비 성경적인 이름을 반복적으로 짓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2) 이방인
성경에는 오벧에돔이 “가드 사람”이라고 나오는데요.
가드 사람이라면, 블레셋 사람입니다.
가드는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과 함께 블레셋의 5대 도시 중 하나이거든요.
또한 그의 이름이 오벧에돔인데요.
이방인이니까, 이방스러운 이름(에돔의 종, 에돔을 섬기는 자)을 가진 것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웃사가 언약궤로 인해 죽임 당하자, 아무도 언약궤를 맡으려 하지 않았고, 결국 이스라엘 지역에 살던 이방인, 블레셋 사람 오벧에돔에게 맡겼다는 의견입니다.
유대인(그것도 레위인)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이방인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겼습니다.
마치 사사기 시대에 룻이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구도입니다.
룻기가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엉망으로 섬기고 있는데, 그들이 멸시하던 모압 소녀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긴 사건이잖아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후대의 레위인들이 오벧에돔이란 이름을 지은 것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벧에돔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법궤를 맡아서 제대로 섬기고 축복받았잖아요.
그래서 그의 신앙을 기념하여서, 비록 이방의 이름이지만, 레위인의 이름으로 사용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55F4335B0F556323
https://www.hbible.co.kr/media/bible/addition_info/1chr/1chr_15_29.svg
https://www.youtube.com/watch?v=v1DdUVL-r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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