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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3/12/23 삿 9-12장, "입다" Publish on March 13,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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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74회 작성일 23-03-13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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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독 식구 여러분, 

오늘은 삿 11장을 묵상하겠습니다.

입다 이야기입니다.

사사기가 후대로 갈수록 사사들에게서도 흠과 결점이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1) 기드온 사사는 용감한 용사였지만, 그 아들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을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2) 야일 사사는 자식을 30명이나 두고, 어린 나귀를 타고 다녔습니다.

한 부인에게 30명의 자식을 두기는 불가능하겠지요. 

부인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사의 자식들이 다윗왕처럼 나귀를 탔습니다.

즉, 지도자로 대우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사로 기름 부음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왕과 비슷한 권력을 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성경과 어긋납니다.


3) 그리고, 입다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선, 입다의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삿 10: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영적 지도자인 사사도 이렇게 타락하는 시대였으니, 일반 백성들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심하게 우상숭배 했는지, 우상의 목록이 굉장히 깁니다.

바알들과 아스다롯은 기본이고, 주변 이방 나라들인 아람, 시돈(페니키아), 모압, 암몬, 블레셋의 신들을 다 섬깁니다.

사회 전체에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었고, 수많은 우상을 섬기는 다신교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 입다의 출신은 어떨까요?

그는 길르앗 출신의 아버지와 기생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서자(이복자녀)입니다.

쉽게 말해, 아버지가 기생과 바람을 피웠거나, 기생을 첩으로 들였다는 말입니다.

그 인생이 편했을 리 없겠지요.

본처의 자식들이 그를 내쫓았습니다(11:2).


입다는 평가하기가 참 어려운 인물입니다.

양극단의 모습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입다를 믿음의 선진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히 11:32).

그러나 사사기에 나오는 모습은 부정적인 모습도 많습니다.

그의 양면을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I. 긍정적 평가

1. 깡패이자 피난처 

천대받던 입다는 결국 깡패가 됩니다.

무익한 존재로서 떠돌아다니는 잡류가 됩니다.

우리 성경에는 비류(개역한글), 잡류(개역개정), 건달패(새번역)라고 번역했는데요. 

실제 히브리어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수탈당하고, 박탈당한 사람들이었고, 갈 곳이 없으니 입다에게 몰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양반에게 수탈당한 농민이 결국 산으로 들어가 산적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갈 곳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둘람 굴에서 다윗에게 600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2. 입다의 시각

야일과 입다는 모두 요단강 동편 지역 사람들입니다.

요단 동편에 거하는 이방 민족인 암몬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위기가 닥치자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지도,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부지런히 섬기던 우상들에게 도와달라 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서로 말합니다.

“(삿 10:18)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할꼬? 그가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

아무도 선 듯 나서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 눈치만 보는 형국입니다. 


결국, 그들은 깡패요 갱단이었던 입다를 찾아갑니다.

요즘으로 치면, 교회에 어려움이 생겼는데, 교회가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깡패를 고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비슷한 형국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영적 수준이 어떠한지를 극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기가 찬 장면입니다.)


3. 입다와 장로들의 시각 차이

“(삿 11:8)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삿 11: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당시 사회의 지도자이고, 종교적인 지도자들인 장로들의 시각과 입다의 시각차가 보입니다.

장로들은 입다가 잘 싸우니까, 암몬과 전쟁에서 장군으로 앞장서서 싸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입다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시면”이라고 말합니다.

입다의 태생이나 출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시각,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좋은 집안 출신인 야일의 아들들은 사사의 아들로 태어나 나귀나 타고 다닌 것 외에 한 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여호와가 전쟁의 주인이시고, 언약 안에 있기만 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고 믿지 못했습니다.

어려움에 빠지니까, 사람을 의지하는 모습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점에서, 입다는 훌륭합니다.

그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의지할 데가 없기에,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에게 축복이었습니다. 


4. 입다의 역사의식

전쟁에 나간 입다는 암몬 왕이 내세운 전쟁의 명분이 가짜 뉴스에 근거한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압이나 암몬 땅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에돔과 모압 땅을 우회해서 갔고, 아모리 땅(시혼과 옥)을 정복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300여 년을 살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입다도 아는 역사 이야기를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말하지 못했을까요?

어쩌면 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데 정신이 팔려, 하나님의 역사에 무지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어떻게 무력으로 저들을 제압할까만 골몰했을 수도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 백성 같은 모습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도 입다의 역사의식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5. 여호와의 영

전쟁에 나간 그는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삿 11:27).”라고 기도했고, 하나님께 의탁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진짜 전투가 벌어질 때,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셨습니다(삿 11:29).” 

하나님의 영이 함께한 입다는 크게 승리했습니다.

진짜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입다 같이 천대받고, 하찮은 인생이라도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시면, 위대하게 쓰임 받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입다도 이렇게 알고 있고, 말하고 있고, 충성하고 있는데,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 하고 있냐고 답답해하시는 하나님의 외침을 들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답답한 백성들일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을 되돌리기를 포기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게 됩니다. 


II. 부정적인 평가

1. 인신 제사

전쟁이 나려 하자, 입다가 인신 제사를 서원합니다.

그런데 한글 번역은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딸이 맨 먼저 나왔고, 딸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자기 자녀들을 불에 통과시켜 몰록에게 바쳤던 암몬 자손처럼, 딸을 제물로 바쳤습니다(레 18:21, 왕하 23:10).

사사조차도 딸을 인신 제물로 바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사기 당시의 혼탁한 영적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이방 제사 문화에 물들어있고, 이방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2. 십볼렛

그런데 더 큰 비극은 전쟁 후에 나타납니다.

전쟁 후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를 찾아갑니다.

전쟁하는데 왜 부르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정황상 보면, 전쟁에 질 것 같으니까 자기들이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쟁에 이기니까, 괜히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어쩌면 전리품이 탐났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기드온과 입다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기드온도 전쟁 후에 에브라임 사람들의 시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드온은 겸손히 말하여 그들의 노여움을 풀어주었습니다(삿 8장).

그러나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화를 냈고, 전쟁했습니다(삿 12장).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고, 에브라임은 요단강을 건너 도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나루턱에서 “쉽볼렛(sh 발음)”이라 발음하면 살려주고, “십볼렛(s 발음)”이라 발음하면 다 죽였습니다.

당시에도 사투리나 억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발음을 듣고 지역을 판단했다는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경상도 사람에게 “쌀”을 발음해 보라고 해서 “쌀”이라 하면 살려주고, “살”이라 하면 다 죽였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분열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4만 2천 명이나 죽였으니, 거의 살육 수준입니다. 


아!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주여, 이 땅의 황무함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tfqZhmk2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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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입다의 서원에 대한 다양한 해석 소개> 


입다가 딸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은 몇 가지 해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1) 전통적 해석- 인신 제사

전쟁이 나려 하자, 입다가 인신 제사를 서원합니다.

그런데 한글 번역은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딸이 맨 먼저 나왔고, 딸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자기 자녀들을 불에 통과시켜 몰록에게 바쳤던 암몬 자손처럼, 딸을 제물로 바쳤습니다(레 18:21, 왕하 23:10).

* 장점- 사사조차도 딸을 인신 제물로 바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사기 당시의 혼탁한 영적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이방 제사 문화에 물들어있고, 이방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 단점- 성령이 임한 입다가 하나님의 전쟁에 나가면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이방의 방식으로 제사한다는 것이, 그것도 사람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서원했다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2) 나를 영접하는 그(사람, 사물, 짐승)

한글 번역은 바치려는 대상이 사람인 것처럼 번역되어 있습니다.

인신 제물을 바치겠다는 서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를 보면, 원문은 사람이나, 짐승, 사물을 다 포함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만나는 것”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즉, 누구든지는 “사람”뿐 아니라, “짐승”이나 “사물”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처음에 입다가 의미했던 서원에는 사람보다는 짐승을 먼저 의미했을 텐데, 비극적이게도 딸이 먼저 나왔다는 해석입니다.

 

3)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여호와께 돌린다는 표현을 히브리어에서 직역하면 “여호와를 위하여, 여호와에게 속하여”입니다.

레위인은 여호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고, 여호와께 속한 사람들인데요.

하나님은 레위인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민 8:13)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 여호와께 요제로 드릴지니라.”

이것은 유대인을 제사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한다. 성막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입다의 서원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입다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짐승을 먼저 만난다면 번제로 드리고, 사람을 먼저 만난다면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하나님 것)으로 돌리겠다.”라는 의미라는 해석입니다.


4)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이것은 3번 해석과 연결된 해석입니다. 

“(삿 11:37)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한글 성경은 입다의 딸이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는 죽음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나의 처녀 됨을 인하여 애곡하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SV도 “weep for my virginity”라고 번역했습니다.

물론, 처녀 됨을 애곡하는 것이 처녀로 죽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성막에 나실인으로 바쳐졌다는 말일 수도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막에서 봉사하면서 평생 결혼도 못 하고 처녀로 살아야 하는 것을 애곡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 단점- 이 해석은 애곡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게 그렇게 애곡할 일인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요즘도 수녀나 비구니가 되는 분들이 있지만, 그렇게 애곡하진 않거든요.

더구나,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4일씩 애곡한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입다의 서원과 제사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소수의 주장들이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만큼 설득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전통적인 주장이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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