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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5/14/23 에 8-10장, “부림절” Publish on May 15,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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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02회 작성일 23-05-15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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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에스더서 9장을 묵상하겠습니다.


오늘 통독 본문이 8-10장을 읽을 차례인데요.

■ 8장: 유다인들이 학살을 면할 길이 열립니다.

■ 9장: 유다인들이 대적들을 진멸하고, 부림절을 지킵니다. 

■ 10장: 왕과 모르드개가 높임을 받는 것으로 에스더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9장에 “부림절”이 나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초자연적으로 구원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부림절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날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 속에서 최선을 다해 싸운 결과였습니다.

부림절이란 이름도 “부르(제비뽑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것은 위기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도 포기치 않고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모르드개, 에스더 등)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도우셨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고 분명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는 두 가지를 묵상합니다.


1. 선교적 삶

에스더서는 단지 유다인들이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른 모든 성경과 마찬가지로, 에스더서도 선교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웬 선교냐고요?

■ 선교라 하면, 좁은 의미로 “해외에 나가서 전도하고, 교회 세우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본다면, “열방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알리고, 하나님을 믿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것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선교란 단어가 없습니다.

좁은 의미의 선교도, 오순절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선교로 본다면, 성경 전체에 선교의 개념이 가득합니다.

구약이 유대인을 위한 책이라고, 하나님이 유대인만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실은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온 땅에 관심이 있고, 모든 인류가 구원받기 원하십니다.

구약에서 유대인을 선택한 것도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후에 이들을 제사장 민족으로 세우셨습니다(출 19:5-6).

즉 열방이 하나님께 나오는 통로로 세우신 것입니다.

수많은 잡족들(출애굽에 동참한 이방인들), 겐 족속(모세의 장인이 속한 족속), 기브온 족속(여호수아 정복 때), 느디님(전쟁 포로 출신의 성전 일꾼들), 솔로몬 신하의 자손들 (성전 공사했던 역군들) 모두가 이방인들입니다. 

예수님 족보에 있는 기생 라합도, 모압 여인 룻도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관심은 온 열방도 포함하고 있고, 이방인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의 백성 되기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8:17에서 부림절의 기원이 나오는데요.

부림절을 통해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7)”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부림절이 단지 위기 속에서 유대인이 구원받은 사건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로 이 일을 보게 하셨고, 

포로로 잡혀 온 저 백성들을 저토록 보호하고, 구원하는 신이 누군지 궁금하게 하셨고,

그 하나님께 보호받는 유대인들을 두렵게 하셨고,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믿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더서와 부림절이 가지는 선교적 측면입니다.


2. 유대인의 이방인 살육

9장에서 유대인들은 하만과 그 가족과 모든 대적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어떤 분들에겐 좀 껄끄러울 수 있습니다.

수산 성에서만 500명과 300명을 죽였고, 전국적으로 75000명을 죽였습니다.

이 끔찍한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자기들이 학살당할 뻔했는데, 이제 돌이켜서 남들을 학살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을 몇 가지 각도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 

1)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2) 하만과 유대인 대적 세력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기 때문에(하만이 당시 총리였으니, 당연하지요), 그들을 전국적으로 처단하다 보니 숫자가 많아진 것입니다.

3) 이것은 영적 정복 전쟁이요, 가나안 정복 전쟁의 재판입니다.

하만은 아각 사람입니다. 아각 하면 아말렉 왕 아각이 떠오르죠?

모르드개는 기스의 후손이고, 기스는 사울의 아버지입니다.

즉, 사무엘 시대에 아말렉 왕 아각과 사울이 전쟁했듯이, 

지금 하만과 모르드개가 전쟁한 것입니다.

사무엘 시대에 사울은 아말렉과 싸워 이기고도 진멸하지 않는 죄를 범했지만, 

지금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대적인 하만과 그의 세력들을 진멸함으로써, 악을 뿌리째 뽑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돌아봅니다.

저는 얼마나 저의 영적인 대적들과 싸우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진멸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히브리서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한다고 경책했는 데요(히 12:4).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도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포기치 말라고, 최선을 다하라고,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바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사단의 세력을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매일의 삶 속에서 영적으로 싸우고, 그런 모습을 통해 주변에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들로 주님을 믿게 하는 것이 선교적 삶(missional living)임을 생각합니다.

오늘 내가 싸울 영적 전쟁은 무엇일까요? 어디일까요?

오늘도 그 싸움을 잘 싸우고, 부림의 잔치를 누리는 선교적 삶을 살아가길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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