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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5/18/23 욥 8-10장, “빌닷과 욥의 첫 번째 대화” Publish on May 18,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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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11회 작성일 23-05-18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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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안녕하세요? 

요즘 욥기 읽기가 즐거우신지요?


욥기는 길고, 대화도 반복되기 때문에, 구조를 파악하면서 읽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마치 숲속에서 지도가 길 찾는 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번에 욥기 서론에서 설명해 드렸던 욥기의 구조를 다시 가져올게요.

A. 욥의 고난 (1~2장)

 B. 욥의 탄식 (3장) 

  C. 친구들과 3번의 논쟁 (4-27장)  

   D. 지혜는 어디 있나? (28장)

  C’ 3번의 발언 (29~42장) 

 B’ 욥의 중보기도 42:7-9 

A’ 욥의 회복 42:10-17


오늘은 욥기 8-10장을 읽을 차례인데요. 

“C. 친구들과 세 번의 논쟁” 부분에서 두 번째 친구인 빌닷과 논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8장은 빌닷의 충고이고, 

9-10장은 욥의 대답입니다.


I. 빌닷의 충고

두 번째 친구인 빌닷이 충고하는 논리는 첫 번째 친구인 엘리바스와 비슷합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은 죄의 결과(인과응보)이다. 그러니, 회개하면, 번영한다.”는 논리였 고요.

빌닷은 그 인과응보를 욥과 자녀에게도 적용합니다. 인과응보는 선조들의 지혜이니, 따르면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와 비교하면, 빌닷은 말이 좀 더 과격합니다.

어제 본문에서, 엘리바스의 충고에 대해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당하게 취급하셨다 (7:11-21)”라고 대답했잖아요? 

이 말을 들은 빌닷은 ‘하나님의 공의가 욥에게 비난당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의로운 재판관이다’라고 확신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욥이 말할 때, 거칠게 뛰어듭니다. 

(욥 8: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라고 말합니다.


빌닷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8:3), 욥의 자식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며(8:4), 욥에게 닥친 불행도 욥이 정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8:6)”는 것입니다. 

특히, 4절에서 죽은 자식들까지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욥 8:4)” 

자녀가 죽은 게 자기 죗값을 받은 거라니요…….

(기가 찹니다. 제가 욥이었다면 상당히 화가 났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빌닷의 의도가 선하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을 찾고 청결하게 행하면, 하나님이 돌봐주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 문맥에서 나오는 말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입니다.

(구절 자체는 참 좋은 말이지만, 문맥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식당이나 사업장에 걸어 놓는 것은 그리 어울리는 것 같지 않습니다. 

빌닷이 말한 문맥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너의 시작(현재)은 하나님께 죄를 범해서 이 모양이고 자녀도 죽었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면 나중엔 잘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빌닷의 주장은 “옛사람들의 지혜”와 “과거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전통에서 배우라고 합니다.

(욥 8:8) 청컨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빌닷의 주장을 풀어서 말하면, “우리의 지혜는 오랜 기간의 축적된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다(8:11). 그러니 전통적 가르침인 인과응보에 순응하면, 하나님이 다시 웃음과 즐거움 을 회복해 주실 것이다(8:21)”라는 것입니다.


II. 욥의 대답

9-10장은 빌닷의 말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욥 9:2)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빌닷아,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이 말입니다.

한마디로, 전통을 강조하는 빌닷의 뻔한 말은 욥에게 상처만 줄었을 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충고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줄도 알고, 온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줄도 압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이 왜 온전한 자를 치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다 멸망시키신다(욥 9:22).”라고 불평합니다.

욥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욥이 잘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과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간 것입니다. (즉, 기도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 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10:2).”

해결책이 없는 절망, 이유를 알 수 없고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물으러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알고 있는 것으로는 지금 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다른 답이 있을 것입니다.”


욥이 믿음의 의인인 까닭이 무엇일까요?

적어도 10장이 보여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가 고난을 잘 견뎠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답을 잘 찾았기 때문일까요? 이것도 아닙니다.

답을 찾으러 하나님께 나가는 자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절망 중에도 믿음의 밧줄을 놓지 않고, 기도의 끈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1-2장에서 모습은 모범답안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지속되고, 친구들과 대화가 진행될수록 욥의 절규는 더욱 깊어 갔습니다.

7장에서, 욥은 불평하며 기도하기도 하고(7:11), 사람이 무엇이기에(욥 7:17) 라고 한탄 하기도 했습니다.

9장에서도, 욥은 자기는 의롭고 온전(완벽)한데, 왜 고난 받냐고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점점 불완전한 모습이 노출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늘 고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껜 솔직한 게 더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해결해 주기도 하십니다.

인내하게도 하십니다.


욥도 자기가 참을성이 좋아서 인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다 보니, 인내함을 당한 것입니다. 

(욥의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어색한 수동형 문장을 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가다 보니, 하나님께 그의 생각과 인격을 항복함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에 의해 의롭게 됨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최선입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광야 같은 상황이어서 기도하고, 

이해할 수 없어서 기도하고,

힘들어서 기도하고,

기댈 곳 없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 샌가 고난의 광야에서 길을 찾게 됩니다. 

주님이 내 손 잡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광야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주님,

저도 기도하게 하소서.

가끔은 알 수 없는 답답함을 겪기도 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기도하게 하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을 받게 하소서. 

광야를 통과하게 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qaIqilD7Q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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