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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5/21/23 욥 18~19장, “빌닷과 욥의 두 번째 대화” Publish on May 21,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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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46회 작성일 23-05-2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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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주일 잘 보내고 계신지요? 

오늘 본문은 빌닷과 욥의 두 번째 대화 장면입니다.


I. 18장 빌닷의 두 번째 충고

빌닷의 충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8:1-4 

(욥 18:2, 개역)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개역 성경은 너무 점잖은 문어체로 번역해서, 뉘앙스를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2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볼까요?  

(욥 18:2, 새번역) 너는 언제 입을 다물 테냐? 제발 좀 이제라도 눈치를 채고서 말을 그치면, 우리가 말을 할 수 있겠다.


느낌이 오시나요? 

“진짜 말 많네. 언제 입 다물래? 왜 그리 눈치가 없니? 네가 말을 그쳐야 우리가 말할 것 아니냐?”

빌닷의 두 번째 말도 첫 번째 말처럼 과격하게 시작합니다.

친구에게 입 다물라고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인과응보를) 가르쳐 주는데도, 너는 아직도 무죄를 주장하는구나.

그건 우리 충고를 x 짖는 소리 취급하는 거냐? 내 말이 짐승소리처럼 들리니?”라고 합니다 (18:3). 


4절에선 욥을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이 말도 참 못된 말입니다.

욥이 지금 심한 피부병으로 너무 가렵잖아요. 

그래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데요(2:8).

그런데 그걸 보면서, “자기 울분에 못 이겨 스스로 자기 몸을 찢고 있다”라고 합니다.

사실에 바탕해서 조금만 말을 뒤틀면, 얼마나 다른 말이 되는지요.

욥을 불쌍히 여기던 마음은 이미 다 사라졌습니다.

조롱하고, 상처주기에 급급합니다.


4절에 계속해서, “네가 그렇게 한다고 변하는 건 없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다.”라고 합니다.

욥에게 힘 빠지는 소리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욥의 심정은 어떨까요?

마음이 찢어질 것입니다.

이미 첫 번째 논쟁에서 충분히 욥을 욕한 줄 생각했는데, 그것으로 충분치 않은 것 같습 니다.

상처 주는 말을 하는 데에는 절대 지치지 않습니다.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무한 반복 도돌이표입니다.


2) 18:5-21

빌닷은 악인의 최후를 아주 회화적으로 묘사합니다.

a. 악한 자의 빛은 꺼집니다(5-6).

(욥 18:5)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b. 악인은 자기 함정에 빠진 사냥꾼같이 됩니다(7-10).

(욥 18:9) 그 발뒤꿈치는 창애에 치이고 그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c. 살은 썩고, 팔다리도 파 먹힙니다(13).

(욥 18:13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 지체를 먹을 것이며

살던 집터에는 유황이 뿌려집니다(15).  

(즉, 폐허가 된단 말입니다.)

(욥 18:15)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기가 찬 말들을 반복하고 있는데요.

19절은 기가차서 웃음이 날 정도입니다. 

(욥 18:19) 그는 그 백성 가운데서 아들도 없고, 손자도 없을 것이며, 그의 거하던 곳에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

빌닷이 또다시 자녀를 물고 늘어집니다(8:4). 

후손이 씨가 마른다고 합니다.

자녀를 앞세운 부모에게 자녀를 들먹이며 저주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눈 깜짝하지도 않고, 반복해서 말할 수 있는지.... )


빌닷은 “전통적인 윤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욥이 고통당하는 것은 징벌 받은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무궁무진하신 하나님을 자신이 만든 틀 속에 가두어 단순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전통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신데, 말입니다.)

그런데, 욥이 자기는 죄가 없다 하니, 들을수록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그 입에서 나오는 칼로 난도질했습니다. 

단순 무식에 자기 의가 더해지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II. 19장 욥의 대답

욥의 대답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9:1-12

만신창이가 된 욥은 너무 아픕니다.

“네가 언제까지 내 마음을 괴롭게 하고, 말로 나를 산산조각 내겠냐? 이토록 나를 학대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냐?” 합니다(19:2-3).

그리고 빌닷의 논리를 반박합니다.

빌닷은 악하고 멍청한 사냥꾼이 자기가 만든 그물에 빠졌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그물에 가둔 것이라 주장합니다(19:6).


2) 19:13-22

그리고 욥은 사방에서 고립되고, 따돌림 당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형제도, 친구도, 종들도 아내조차도 자기를 버렸습니다.

피골이 맞닿은 비참한 모습만 남았지만, 여전히 박해당하고 있으니(20-22), 어찌 한숨이 안 나오겠습니까?


3) 19:23-29

(욥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 19: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그런데, 너무너무 절망하고, 죽고 싶은 마음으로 몸부림칠 때, 하나님은 그곳에서 구속자와 부활에 대한 소망을 만나게 하십니다. 

대속자(redeemer)는 히브리어로 고엘(Go‘el)입니다. 

고엘은 친족 구속자(kinsman redeemer)란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룻기에서 보아스 역할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론 메시아(예수님)를 의미합니다.


욥은 그동안 뭔가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해줄 존재가 필요하고, 변호사가 필요하단 생각을 해왔습니다.

(욥 9:33) 양척(하나님과 나)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 16:19)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변호인)이 높은 데 계시니라.

(욥 16: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

(욥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억울했던 욥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따졌습니다.

법정에서 재판관에게 호소하듯 하고 싶은데, 혼자는 도저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변호사가 필요함을 절감했습니다.


친구들은 보니, 욥의 변호사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고소자였지요.)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편에서 중재해줄 변호사가 없습니다.

더 깊은 절망의 밑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적 중재자를 보게 된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나의 대속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어서라도, 영혼이 육체 밖으로 나와서라도, 부활해서라도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메시아 대망 사상이고, 부활 신앙입니다. 

    

III. 묵상

1. 여기에 신앙의 역설(paradox)이 있습니다.

* 욥은 하나님께 따지고 불평했습니다.

*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합니다.

분명 모순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믿음 안에 있으면, 상통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mystery)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제 딸과 아내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사춘기 시절에, 희진이는 툭하면 엄마에게 짜증내고 불평했습니다. 완전 자기 밥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희진이가 가장 기대고 마음을 터놓는 존재도 엄마입니다.

이건 보통 관계에선 존재하기 어렵지요.

그러나 엄마와 딸의 관계라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 불평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소망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만 가능한 모습입니다. 


2. 욥은 하나님이 자기편이 아니고, 자기를 공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1절에서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라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너무 힘들다 보니, 욥이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한 번도 욥을 떠난 적이 없고, 욥을 공격한 적도 없습니다.

늘 욥과 함께 하셨고, 욥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힘든 상황이 되면, 하나님이 저를 사랑치 않는 것 같고, 저는 하나님께 벌 받는 것같은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에 기초한 신앙일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에 기초한 신앙을 가지려고 애써야 하겠습니다.


3. 욥기를 읽고 있으면, 욥기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상상하게 됩니다.

엄마가 아기를 딸을 보듯, 욥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에스더에서 하나님이 우연 속에서, 수면 아래에서 역사하고 계셨던 것 기억나시나요?

동일하게, 욥기에서도 하나님은 욥의 고통 속에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픔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그것을 가슴 아파하시는 하나님, 그러면서도 그 고통을 이겨내길 원하시는 하나님, 그 아픔을 통해 메시아를 보게 하시고, 부활 신앙을 품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욥기가 쓰인 때는 족장 시대라고 추측합니다.

아브라함이 활동하던 시대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이 동방의 이방인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확실하게 대속자를 고백하고, 부활 신앙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유익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고난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엿볼 수 있습 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을 때에라도,

사람들이 모두 나를 떠나는 때에라도, 

흔들리지 말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위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9ICmbPTr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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