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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5/22/23 욥 20~21장, “소발의 두 번째 충고” Publish on May 22,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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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98회 작성일 23-05-22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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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욥기 20~21장입니다.

욥기 4-27장에는 욥과 친구들이 3번 논쟁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 4-14장에서 첫 번째 말싸움을 했고,

◆ 15-21장에서 두 번째 말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엘리바스와 빌닷이 등장했고, 오늘은 소발이 말하고 있습니다.

* 20장은 소발의 두 번째 충고이고,

* 21장은 욥의 두 번째 대답입니다.


I. 소발의 두 번째 충고(20장)

앞에서 욥이 빌닷과 말하면서, “나는 악인이 아니다. 나는 구속자에 대한 비전(소망)을 품고 있다”라고 했잖아요?

그러자, 듣고 있던 소발이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화를 시작합니다.

(욥 20:2) 그러므로 내 생각이 내게 대답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초급함이니라.


이것은 “자네 말을 듣고 있자니, 화가 나서 도저히 입 다물고 있을 수가 없군. 속이 끓어 올라, 나도 내 말 좀 해야겠네(욥 20:2, 쉬운말).”란 뉘앙스입니다.

(그런데 소발은 한 번도 입을 다물고 있던 적이 없었습니다. 첫 번 대화에서도 “말이 많으 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욥 11:2)?”라고 하면서, 과격한 말을 쏟아냈었습니다.) 


1) 소발은 얍삽합니다.

소발이 주장하는 바는, “악인은 잠깐 흥할 순 있어도, 결국 영원히 망한다.”라는 내용 입니다(20:5-7).

그가 하는 말을 언뜻 보면, 악인의 최후를 일반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욥을 돌려까기하고 있습니다.

* “(욥 20:6) 그 높기가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 한때 욥은 주변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칭송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 “(욥 20:8) 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지금 욥이 누리던 행복은 꿈같이 사라졌습니다. 

* “(욥 20:26)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사르리라”-> 하늘에서 불이 내려 욥의 자녀들이 죽었던 사건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 “(욥 20:7)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욥 20:11)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 욥이 건강도, 사회적 지위도 다 잃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욥 20:15)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다시 토할 것은” “(욥 20:28) 그 가산이 패하여” -> 욥은 경제적으로도 폭삭 망한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소발의 말 중에, 건강 잃은 것도 욥이고, 흙먼지 위에 누운 것도 욥이고, 하늘에서 내리는 불을 맞은 것도 욥이고, 재산 잃은 것도 욥입니다. 

그냥 일반적인 얘기하듯 하지만, 실은 계속 욥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는 자기의 성냄과 주장하는 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없는 말까지 지어내고 있습 니다.

“(욥 20:19)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림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 이니라.” 

욥이 의로움은 하나님이 인정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욥이 학대와 포탈을 일삼았다니요. 

“(욥 20:20)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더구나, 그런 욕심이 끝이 없다고 모함합니다. (헐...)


욥의 친구들이 왜 이렇게 욥에게 상처를 주는 것일까요?

a. 그들은 욥의 오랜 친구들입니다. 

유유상종인데, 욥이 악인을 친구로 삼았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 이들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들일 겁니다.

b. 더구나, 멀리 떨어져 사는데도 욥을 위로하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데만은 에돔 지역이고, 수아는 갈그미스 남쪽 지역이고, 나아마는 시리아와 아라비아 사막 접경 지역이라 추측합니다.

암튼 엄청 멀리서 왔습니다. 

c. 그런데 막상 욥을 만나니, 욥이 자기들의 가치관과 기준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엔 충고로 시작했는데, 욥이 받아들이질 않으니까, 부아가 납니다.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아픈 곳을 찌르고, 돌려까기도 하고, 거짓말까지 하는 것입 니다. 


소발(과 친구들)의 대화를 보면서, 몇 가지 깨달음을 얻습니다.

1)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아무리 맞는 말을 하더라도, 아무리 목표가 옳아도, 그릇된 과정과 방식과 표현을 정당화해주진 못합니다.

과장하고, 말을 바꾸고, 거짓말하는 것은 분명히 틀린 행동입니다.


2) 화내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선을 이루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친구들은 주로 욱해서 대화를 시작하는데, 그 대화는 결국 막장으로 치닫게 됩니다. 


3) 저의 생각의 틀을 더 넓히고, 수용성을 가져야겠습니다.

자기주장을 꺾기 싫어하고,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 좋은 결론을 얻을 수 없습 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내가 모르는 것도 있다는 걸 늘 인정해야겠습니다.


4) 상대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마음도 중요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 

“그나저나, 네가 참 힘들겠다.” 

이 말 한마디면 될 일인데 말입니다.


II. 21장 (욥의 대답)

욥은 빌닷(과 친구들)의 논리의 허점을 지적합니다.

“너희들은 인과관계를 말하고 있다. 

선인은 복을 받고, 고난은 악인이 벌 받는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할 때도 있지 않으냐?”고 반문합니다.

“(욥 21:7)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고 질문합니다.

악인들은 대놓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욥 21:15).

그런데 악인이 잠깐 형통한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형통합니다. 

어떤 악인은 죽는 순간까지도 평안하게 죽는데, 어떤 의인은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죽을 때조차도 고통스럽게 죽기도 합니다(21:23-25). 

 

기본적으로, 세상은 인과관계로 굴러갑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욥을 그 인과관계가 깨어진 상황 속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중에, 욥기의 결론은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물론, 기본적인 인과법칙은 늘 존재합니다.

신명기에서도,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신 28장). 

잠언에도 하나님의 길(지혜의 길)을 따르는 자는 안연히 살며, 평안하고 했습니다(잠 1:33). 

  

그러나 세상에는 인과관계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도 많습니다.

악인이 형통한 예도 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도 있는 게 현실입니다(전 7:15, 8:14). 

아삽도 그런 일들 때문에 거의 넘어질 뻔했다고 고백했습니다(시 73:2).


이 질문은 오늘 우리들도 자주하는 질문입니다.

현실을 살다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또는 대충 믿으면서) 오직 자기의 유익만을 위하여 사는 자들은 저렇게 잘 되는데, 정작 헌신적으로 하나님 믿으며 사는 자는 왜 힘든 삶은 사는 것일까?’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은 인과관계를 넘어섭니다. 

저도 처음엔 인과관계로 신앙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잘 믿으면 복 받는다고 생각하고, 제가 잘못되면 벌 받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뭘 잘못했는지, 회개할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랄수록 그런 단순함으론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음을 깨달아 갑니다.


믿음은 인과관계라기 보단, 인격적 신뢰입니다.

예를 들어, 아기가 엄마를 믿는 건 엄마에 대한 무한 신뢰이지, 인과관계가 아니잖아요. 

고난과 심지어 죽음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주님,

저도 고난이 부담스럽고 싫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이 인과관계가 아니라면, 다른 그 무엇이라면, 그것을 따라가야 하겠다고, 조심스레 고백해 봅니다.

오늘 연약한 저의 모습 중에 임재하시고, 더욱 성숙한 신앙을 주소서.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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