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4/23 욥 25~26장, “빌닷의 세 번째 충고” > 묵상편지

본문 바로가기

묵상편지

05/24/23 욥 25~26장, “빌닷의 세 번째 충고” Publish on May 24,2023 | 관리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62회 작성일 23-05-24 11:58

본문

BCPC 식구 여러분,  

요즘 날씨가 점점 여름 같아 집니다.

오늘 낮 온도가 80도를 넘었습니다.  


욥과 친구들의 설전도 뜨겁기 그지없습니다.

오늘은 빌닷의 세 번째 충고이자, 마지막 설전입니다.


I. 25장 (빌닷의 세 번째 충고)

친구들의 말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빌닷의 세 번째 충고는 짧습니다. 

더는 할 얘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발은 아예 세 번째 충고를 하지 않습니다.)


빌닷은 하나님이 주권과 위엄으로 이 땅을 통치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더기 같고, 벌레 같은 미천한 인생이 어떻게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있겠냐고 합니다.

(여전히, 너무 좋은 말들이고, 욥을 돌려서 정죄하는 말입니다.)


II. 26~27장 (욥의 세 번째 대답)

욥도 지치는 것 같습니다.

빌닷의 말에 비아냥거림으로 대답합니다.

“자네들은 이렇게 무력한 사람을 잘도 도와주는군! 힘이 다 빠져버린 사람을 잘도 붙들어 주는군. 자네들은 지혜 없는 나에게 정말 멋진 충고를 해주어, 자네들의 대단한 통찰력을 잘 나타내 보여주었구나. 그런데 자네들은 도대체 누구 들으라고 그런 말을 하는가? 도대체 누구에게 영감을 받아서 그런 말을 하는가? (26:2-4, 쉬운말)”


그리곤, 빌닷이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을 얘기한 것에 대해 응수합니다.

자연을 (창공과 땅과 구름과 달과 수면의 경계와 하늘과 바다를) 통치하신다고 합니다(26:7-13).

(참고로, 라합(26:12)은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바다 괴물(sea monster)을 의미합니다. 폭풍(storm)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의 능력 중에서 아주 적은 부분에 불과하며 우리가 그에 대하여 들은 것도 세미한 속삭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26:14, 현대인의 성경)”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런 자연현상도 이해 못 한다. 너는 이해하니? 난 못하는데? 네가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나에게 훈수를 두고 있는데, 진짜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그런 충고를 하는 거니?”라고 되묻는 것입니다.


27장에서 욥은 악인이, 즉 자신의 원수가 당할 저주에 대해 말합니다.

즉,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가 나를 정죄하고 저주하는데, 실은 너희가 이런 저주를 받을걸?”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21절에 동풍은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풍을 의미합니다.

사막 열풍이 불면 농작물이 말라버리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사라질 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 오늘 제게 도전되는 구절은 27:2입니다.

(욥 27:2, 개역)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욥은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고 합니다.

맹세한다는 건, 그만큼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신체를 두고 맹세하기도 합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또는, 부모님의 명예를 두고 맹세하기도 합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후레자식이다.”

또는 천지를 두고 맹세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하늘을 두고, 땅을 두고 맹세한다”고 말하기도 하죠.

그런데 지금 욥이 맹세하는 수준은 그 보다 훨씬 높은 단계입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전능자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2절을 좀 더 깊이 읽으면, 다른 내용도 눈에 보입니다.

2절을 개역 개정은 약간 다르게 번역합니다.

(욥 27:2, 개역개정)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저는 개역 개정의 번역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방금 욥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했는데요. 

정작 욥이 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입니까?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라고 합니다.

욥이 지금 고백하는 게 뭐냐 하면요. 

하나님이 자기의 경험과 이해보다 더 크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얼마큼 크냐 하면, “나의 의로움을 부정하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실 만큼 전능하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정함을 느끼고, 하나님이 괴롭게 하시는 일 앞에서도 순종하고, 무릎 꿇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편 119편의 고백을 생각나게 합니다.

“(시 119: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아직 욥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고난 받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을 직접 만난 후에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힘들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성실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해나 감정보다, 그 신앙을 더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왜, 언제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돌아봅니다.

“하나님이 내게 잘 해주시고 복주시니까, 하나님을 믿는 건 아닌지? 복 주실 때만 의지하는 건 아닌지?”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상숭배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우상이 나에게 복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을 내게 복주는 존재로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하나님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고, 더 성숙한 관계를 만들어 가길 소원합니다.


고난은 매번 힘이 듭니다.

고통은 매번 아픕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더 이상 아파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 속에 믿음의 눈을 들고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실 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게 침묵하실 지라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보다 보면, 그 상황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과정을 겪고 나서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v0oHeJ8-2k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