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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5/27/23 욥 32-34장 “엘리후의 발언1” Publish on May 27,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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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58회 작성일 23-05-27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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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3번의 발언들(욥, 엘리후, 하나님)중에서, 두 번째인 엘리후의 발언을 읽을 차례 입니다.


본문의 흐름을 다시 짚어 보겠습니다.

지혜는 28장 이후에도 계속 영향을 미칩니다.

친구들과 대화는 하나님을 알고 이해할 지혜가 없다는 벽에 부딪혔습니다.

이때,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내가 지혜를 가르쳐 주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엘리후가 잘난 체하며 등장하지만, 결국 지혜를 가르쳐주진 못합니다.) 


32장~37장에서 엘리후는 4번에 걸쳐서 발언하는데요(32-33, 34, 35, 36~37장). 

오늘 본문에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발언이 나옵니다.

욥기에는 세 친구들은 하나님이 잘못했다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지만, 엘리후에 대해선 말씀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엘리후의 발언에 대해 학자들도 평가가 엇갈립니다. 

어떤 학자는 하나님 등장 전에 나오는, 하나님의 대리인 같은 역할이라 보기도 합니다.

반면에, 어떤 학자는 세 친구와 비슷한 부류라고 봅니다.

저는 후자를 따릅니다.


엘리후는 언뜻 들으면, 유대인 같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엘리후는 “람 종족”이라는 이방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입니다.

그의 이름에는 그가 부정적인 캐릭터라는 힌트가 담겨 있습니다. 

* “엘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의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 “바라겔”도 “축복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 “부스”는 “수치, 경멸”이란 부정적인 뜻입니다. 

* “람”은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높다”는 뜻이지만, 부정적으로는 “교만하고 오만하다”는 뜻도 됩니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신앙적으로 보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좀 더 알고 보면, 부정적인 인물이라는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엘리후의 발언을 보면, 굉장히 심오해 보입니다. 

그는 어리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많은 것 같습니다.

지식적으로는 신학자 뺨치는 높은 수준의 신학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욥과 친구들이 알지 못했던 지혜에 대해 뭔가 해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나 태도에서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그는 등장하자마자 화를 냅니다.

또한, 그의 대화에는 전 재산과 자식과 아내를 잃고, 건강까지 잃은 사람에 대해 동정하는 뉘앙스가 없습니다.

잘난 척하고, 차갑게 정죄할 뿐입니다.

엘리후는 종교적인 사람이고, 똑똑하지만, 오만하고, 상대방을 경멸하는 캐릭터입니다.

겉으로는 신학적이고, 신앙적으로 보이지만, 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I. 32~33장 (엘리후의 첫 번째 연설)

엘리후는 등장하자마자 화를 내는데요(32:1-5).

1) 욥에게 화내는 이유는 욥이 하나님보다 의롭다 했기 때문이랍니다. (32:2)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죠. 

욥은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욥 9:20).”고 했거든요.)

2) 세 친구에게 화난 것은, 욥의 주장에 제대로 대응치 못했기 때문입니다(32:12). 


엘리후는 젊고, 노인들과 차별화를 시도하고, 아첨할 생각도 없다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공정하게 말하겠다고 다짐합니다(11~22절).

그래서 뭔가 달라 보입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지만, 그는 전혀 공정하지 않습니다.

알고 보면, 엘리후는 더 기가 찬 캐릭터입니다.

그의 발언 내용을 살펴볼까요?


1. 그동안 그는 열심히 들었습니다.

예전에 욥이 했던 말을 인용합니다.

*욥이 깨끗하고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다고 했고(욥 33:9) 

* 하나님이 욥을 원수로 여기고(333:10, 13:24),

* 욥의 발에 차꼬를 채우고, 욥을 감시한다고 불평했다(33:11, 13:27)고 합니다. 


2. 그는 욥이 의롭지 않은 이유를 제시합니다.

* 감히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논쟁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 합니다(33:12).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신데, 어찌 감히 불평하느냐고 합니다.

*욥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지만, 하나님이 답하지 않는다 한 것도 잘못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데, 인간이 못 알아듣는 것뿐이라 합니다(33:14).

하나님은 꿈과 병과 천사와 기도 응답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응답하고 계시다고 합니다(33:15,19,23,26).

* 고난은 인간을 정화하는 수단이고, 욥의 교만을 막으려는 것이라 주장합니다(33:17)

지금까지 세 친구는 욥이 고난 겪는 원인을 강조했는데요.

이제, 엘리후는 욥이 당하는 고난의 목적을 강조합니다. 

 

“할 말 있으면, 해봐라. 없을걸? 웬만하면 입 다물고 내 말 계속 들어라. 내가 너에게 지혜 를 가르쳐 주겠다.” 합니다(33:31-33).

그래서 자기가 지혜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의 오만함만 자랑했을 뿐, 지혜 를 가르쳐주진 못합니다.

엘리후의 말에도 옳은 말이 많지만, 결국은 욥의 상황이나 현실과 맞지 않고, 적용할 수 없는 말이란 것이 문제입니다.

 

II. 34장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 

두 번째 연설에서도, 엘리후는 욥의 주장을 요약합니다. 

“나는 의로운데 하나님이 내 의를 부정하셨고, 나는 정당한데 하나님이 거짓말쟁이라 하셨고, 나는 허물이 없는데 큰 상처를 입었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며,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써도 소용없었다”라고 조롱하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도, 공의를 그르치지도 않는 분이라 합니다(34:12).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찌 치리하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자를 네가 정죄하겠 느냐(욥 34:17)?”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은 부자라고 대우해주지도 않고, 가난한 자의 하소연도 들어주시는 분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통치자요, 심판자라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욥에게 회개해 본 적이 있냐고 질문합니다(34:31-32).

욥이 무식하게 말하고, 지혜가 없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원한다.”라고 악담을 합니다.


음…. 엘리후는 어린 나이에 똑똑합니다.

그의 말에도 옳은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모습입니다.

아직 식견이 부족합니다.

세상이 자기가 아는 것만이 전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만하고,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남의 입장을 공감하려는 자세도 없습니다.

엘리후의 발언을 듣다 보면, 순간순간 욱하고 올라옵니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싶습니다.


III. 엘리후에 대한 평가

1. 엘리후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 꺼내지만,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로 이용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 집중합니다.

엘리후의 의는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지만, 진정한 기독교의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판단됩니다.


물론, 고난 중의 욥의 행위만 본다면, 욥도 별로 의롭지 않습니다.

욥의 선한 모습은 고난 초기 잠시이고, 그 뒤론 계속 억울하단 말만 했고, 불평도 많이 했습니다.

욥의 행동만 보면, 비난받고 정죄 받는 게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고난의 목적이 교만을 꺾고 죄악을 예방하는 것이란 엘리후의 논리가 완전히 틀린 말이라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 속에서도,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하는 상황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욥은 여전히 의인인 것입니다.


2. 엘리후는 너무나 율법적입니다.

더욱이 완전 내로남불입니다.

욥에 대해 판단할 때는 조급하고, 화내고, 자기 생각을 강요하고, 오만하고, 정죄하고, 성급히 판단합니다.

자기 생각의 틀 안에 욥을 가두고 판단합니다.

반면에, 자기에 대해선 너무 너그럽습니다.

자신이 오만하고, 화내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당하다고 면죄부를 주고 있습니다. 


3. 엘리후와 하나님의 모습이 참으로 비교가 됩니다.

하나님은 내 맘에 안 들고, 내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기다리고 계시고, 빚어가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입니다 (출 34:6).

욥에게도 조용히 찾아와 함께해 주시고,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 주시고,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4.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본다면, 엘리후의 발언은 지혜의 필요성을 계속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도 지혜를 추구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28장 이후로 지혜에 대한 추구는 계속 이어집니다.


주님,

저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저도 엘리후같이 될까 조심스럽습니다.

건방 떨지 말게 해 주시고, 성급히 판단 커나 정죄치 말게 해 주시고, 제 생각의 틀 속에 남을 가두지 말게 해 주십시오. 

좀 더 넓게 보게 하시고, 공감하게 해 주시고, 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진정한 지혜를 배우게 해 주시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JSErd_v2K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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