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6/23 호 11~12장, "11장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 묵상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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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9/06/23 호 11~12장, "11장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Publish on September 06,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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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56회 작성일 23-09-06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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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호 11-12장을 묵상하겠습니다.


호세아서를 간단히 둘로 구분하면 전반부는 1-3장, 후반부는 4-14장으로 나눈다고 했는 데요.

후반부를 좀 더 자세히 구분할 때, 가족들의 이름으로 구분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 4장: 고멜- 이스라엘의 종교적 음란과 멸망

* 5-10장: 이스르엘(하나님이 흩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에서 회복됨

* 11-13장: 로루하마(긍휼을 받지 못한다)-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 선포  

* 14장: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 새 이스라엘의 탄생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인 11-12장은 로루하마(긍휼을 받지 못한다)가 루하마(긍휼을 받는다)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루하마) 다시 한 번 구원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이 긍휼(루하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출애굽 역사에서서 이미 찾아볼 수 있습니다(11;1-9). 

* 11장;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신 바 있는 긍휼의 하나님은(11:8) 그들을 다시 앗수르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실 것이다(11:11).

* 12장; 방황하는 야곱에게 일찌기 긍휼을 베풀어 그를 구원하신 바 있는 하나님이(12:2-4) 동일하게 이스라엘과 유다를 그 긍휼로써 구원하실 것이다(12:5-6, 9).


I. 부모 관계

지금까지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 관계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사랑의 관계는 부부관계 외에도 하나가 더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부모의 사랑 부분이 훨씬 더 큽니다.

설령 자녀가 부모에게 불효할 지라도, 부모는 자녀를 포기치 않고 끝까지 사랑합니다.

그래서 호세아서는 11장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1. “(호 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 그들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아직 경험이 적고, 도움과 양육이 필요한 아이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도우심이 없었다면, 노예 상태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전능한 능력으로, 열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기적으로 출애굽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출애굽한 백성들을 “내 아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출애굽 직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데려 가셨고, 거기에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그때 단지 “백성”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아들”이 되었다 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의 아들이면, 왕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일입니까?


2. “(호 11:2)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사기 시대가 시작되었잖아요.

그때에 왕이 없어서 자기들 마음대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왕국시대에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남유다에는 히스기야나 요시아같은 선한 왕이 나오기도 했지만, 북이스라엘은 100% 악한 왕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언약으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고, 더욱 우상숭배에 힘썼고, 외국의 힘에 의지하려 했습니다.


3.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부모로 비유합니다.

“(호 11: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호 11: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서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잘 걷지 못하는 아이의 팔을 잡고, 한걸음 한걸음을 떼도록 도와주는 부모와 같은 섬세한 사랑이었고요.

걷지 못하고 주저앉을 때에는 품에 안아 주는 자상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의 줄로 인도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멍에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는데 말입니다.


4.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녀 이스라엘은 패역하기가 그지없습니다.

“(호 11:5) 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호 11:7)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 도 없도다."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는데도, 하나님께 돌아가기는 거부했습니다.

첫 번째 우선순위인 애굽으로 못가더라도, 하나님께는 안 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사랑에서 하나님은 2순위도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롯의 가족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왔지만, 지금은 한명도 돌아오는 자가 없다고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무참하게 언약을 깨뜨리는 이스라엘에게 남은 것은 외적의 침입을 받고, 나라가 망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백성들은 결코 그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5. 이스라엘은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자기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니,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은 너희들의 착각일 뿐이다. 너희가 두 마음 가지고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는 것은 나를 버린 것이다.” 라고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제 마음은 어떤지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제 속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우상을 의지하는 마음은 없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II. 회복을 위한 외침

극심한 패역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치 않으셨습니다.

“(호 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 겠느냐? 내가 어찌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11) ...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드마과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같이 멸망했던 작은 성읍들입니다(신 29:23).

지금 상황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의인 10명을 찾지 못해 멸망했는데,

지금 아버지께 돌아오라고 불렀는데도, 한명도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로 멸망당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향한 사랑과 긍휼이 마음속에서 불붙듯 하기 때문입니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자녀를 살리기 원하는 부모의 심정처럼, 마음속이 불타듯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녀들을 구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돌아오는 자들은 모두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 집에서 평안히 머물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 딸아, 돌아오너라. 제발 돌아오너라.” 외치는 아버지의 외침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불타는 심정으로, 목이 터져라 외치는 안타까운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탕자 비유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우리도 아버지 품으로 돌아갈 때,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달려와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시고, 손에 자녀를 상징하는 반지를 끼워주시고, 자유인을 상징하는 신을 신겨 주시고, 멋진 잔치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혹시 저는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외침을 듣고 있는지, 제 영적인 귀는 열려 있는지 돌아봅 니다.

저도 다시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아버지 품에 안기고, 기쁨의 잔치를 누리길 소원합니다.


<참고>

1절은 예수님이 갓난아기일 때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인용되었습니다(마 2장).

이 구절에서 애굽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첫째, 애굽을 지리적인 애굽으로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애굽땅에서 자라다가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정착하는 것이라는 해석입 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땅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땅으로 돌아오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둘째, 애굽을 영적 애굽으로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출애굽할 때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상황 가운데, 장자들이 다 죽는 재앙 속에서 출애굽 했잖아요.

예수님도 헤롯대왕이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상황 가운데, 갓난아기가 다 죽는 재앙 속에서 피신했잖아요.

그러면, 유대 땅이 영적 애굽이라고 본다면, 유대에서 피신한 것이 영적 출애굽이라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PzCjBwj79Q&t=13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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