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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9/12/23 암 8~9장, “9장 다윗의 장막” Publish on September 13,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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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6회 작성일 23-09-1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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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아모스서 마지막 장인 9장을 묵상하겠습니다.


아모스서의 심판 선포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9:10)”라는 구절로 마무리됩니다.

죄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서는 심판 선포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죽이는 데 있지 않고, 살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암 9: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암 9:12)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 다윗의 장막

다윗의 장막은 다윗이 통치하던 지역, 다윗 왕국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왕이었고, 그 시대는 평화가 넘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집을 세우셨고, 그 왕권이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2. 다윗의 무너진 장막

그런데 그 장막이 둘로 찢어졌고, 둘 다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그리고, 곧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세운 언약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키시고, 허물어진 데를 수리해서 말끔히 고쳐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처럼 세워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무너지지 않고, 다시 회복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에돔과 만국

에돔은 출애굽 이후로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적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던 이스라엘이 값을 내겠다고 해도 에돔 땅을 통과하는 것을 거부했습 니다(민 20장).

사울 왕 때도 이스라엘의 적군이었고, 다윗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적이었습니다(삼상 14:47, 삼하 8:11–14).

그런데 하나님은 그 원수 같은 이방인, 에돔도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돔에 남은 자를 두시고, 또한 그들을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더 놀라운 선포가 이어집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모든 민족)”이 기업이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새로 회복될 다윗 왕국이 예전의 다윗 왕국보다 훨씬 강력할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겨우 주변 몇 나라를 정복했지만, 회복된 다윗 왕국은 만국을 차지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에돔 -> 만국”으로 점차 확대되는 개념입니다.


4. 야고보의 해석

그런데 나중에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선교에 대해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행 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행 15: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a. 이때 야고보는 “에돔”을 “아담(사람)”으로 확대해서 해석합니다.

(참고로, 아담은 고유명사로 첫 사람 아담의 이름이지만, 보통명사로는 사람(인류)을 가리 키게 됩니다.) 

비슷한 단어로 살짝 교체하는 word play를 한 것이지요.

그래서 “에돔의 남은 자”를 “남은 사람들”이라 합니다. 이웃에 있는 이방인인 에돔을 넘어 서 모든 이방인, 모든 사람,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있습 니다.

구원의 대상을 놀랍도록 확장합니다.

“이스라엘-> 인류 = 만국”의 개념으로 급작스럽게 확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가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b. 또한, 아모스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했던 것을 야고보는 직접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으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라고 표현했습니다.

만국이 하나님의 기업 되게 하는 것이 선교하는 일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이 성경 해석을 함으로써 이방 선교의 문이 열렸습니다. 

후에,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는 신학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 믿는 것도 이 구절 덕분이라 하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요?


아모스서의 심판 선언도, 회복의 메시지도 모두 선교적인 메시지임을 다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선교적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번 통독에서 말씀을 묵상할수록, 구약이 신약과 연결될수록, 세계와 열방을 끌어 안고 계신 하나님을 더욱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보게 됩니다.

세상 그 누구도 멸망치 않고 다 구원받기 원하시는 하나님, 온 세계를 다 구원하기 원하 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열방을 품고 계신 하나님 가슴의 고동 소리를 듣게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어릴 때부터 외워왔던 이 구절이 얼마나 선교적인 구절인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이 땅의 영혼들을 구원하시려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고, 파송 받고 이 땅에 내려 오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선교는 해외에 나가 전도하고 교회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기선교하러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런 것들은 선교 활동입니다.


진정한 선교는 선교의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선교적인 분이시고, 어떻게 선교해 나가시는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역시도 아직 완전히 깨달은 것도, 완전히 참여하고 있는 것도 아님을 고백합 니다.

어떻게 하면, 선교의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어떻게 하면, 단지 선교 활동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선교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까요?

오늘도 작은 모습이라도 하나님의 선교에 좀 더 참여하려 애쓰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8uPJG2xe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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