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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10/20/23 눅 13~15장, “15장 탕자의 아버지 비유” Publish on October 20,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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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72회 작성일 23-10-20 07:42

본문

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눅 15장을 묵상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탕자 비유”입니다. 

아니, “탕자의 아버지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탕자의 아버지에게 focus가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탕자에 대해 어떤 마음과 태도를 보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I. 아버지는 기다렸습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미리 재산을 나눠달라고 합니다. 

요즘은 부모가 일찍 재산을 분배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죽어야 유산이 분배되었습니다. 

유산을 미리 달라는 것은 “왜 빨리 안 죽냐?,” “기다리기 지친다.” “죽을 때까지 못 기다리 겠으니, 지금 당장 재산을 달라”는 말입니다. 

불효막심한 아들입니다. 

결국,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고, 재산을 얻어서, 먼 나라(이방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간섭없이, 신나게 향락을 즐기면서 살기 원했습니다.


불효자 아들이 떠나간 뒤로, 아버지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놈 잘 갔다. 그런 불효자와는 인연을 끊겠다.” 하지 않습니다.

“(눅 15: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라고 합니다. 

아직 서로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저 멀리 있는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보았습니다.


거리가 먼데,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아버지가 집 안에 있었다면, 마을 밖에 있는 아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메일 마을 어귀에 가서 서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하는 마음으로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눈이 빠지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았고,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떠났고, 그 재산을 탕진 했고, 그동안 아버지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결코 탕자와 인연을 끊지 않았습니다. 

변함없이 아들을 사랑했고,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탕자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이러실 것 같습니다.

타락하고 아버지의 품을 떠난 자녀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

저는 어떤 아들인지 생각해 봅니다.

집 나간 둘째 같은 아들인지, 

아니면 몸은 집 안에 있지만, 마음은 떠나있는 첫째 아들인지….


또한, 저는 부모로서 자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저도 자녀들을 기다려주는 지혜를 가져야겠습니다. 

바쁘고 빠른 세상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자녀들에게도 조급하게 성과를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push하고, 너무 좋은 결과만 강조하는 건 아닌지 돌아봅니다. 


저도 좀 더 인내하며, 기다려주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말할 때도, 한 tempo 쉬고 말하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잠언에 보면, “(잠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했습니다.

저도 자녀에게 급히 화내지 말고, 한 tempo 참아주어야겠습니다. 

오늘 하루라도 기다려주고, 믿어주고, 받아주고, 용납해주는 부모가 되어보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II. 아버지는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동구 밖에서 기다리던 아버지가 어느 날 저 멀리 조그만 점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점이 꼬물꼬물 움직이는데, 점점 커집니다.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거리가 멀었지만, 거지 행색이었지만, 그가 둘째 아들이란 걸 알아보았습니다. 

달려가서 탕자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탕자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해둔 말이 있습니다. 

쫄딱 망하고, 돼지치기가 되고, 돼지죽도 못 얻어먹는 지경이 되어서야, 아버지께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서 품꾼으로 써달라고 부탁하기로 작심했습니다. 

“(눅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그런데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대해달라는 탕자에게 아버지는 어떻게 합니까?

“(눅 15:22-23)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저였다면, 탕자를 야단쳤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미련한 놈아, 아비 말 안 듣더니 꼴좋다. 앞으로 내 말 안 들으면 혼 난다.” 하며 등짝 스매싱을 날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 말 없이 탕자를 받아줍니다. 

안아주고, 입 맞춰 줍니다.

그리고 품꾼이 아니라, 아들로 회복시켜 줍니다.

1) 좋은 옷은 귀한 손님이 올 때 주는 것입니다. 

유대 땅에서 손님이 오면 발을 씻겨 줍니다. 

더 귀한 손님은 머리에 향유를 발라 줍니다. 

더 귀한 손님은 옷까지 새로 입혀 줍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초청받아 갔지만, 발 씻을 물도 얻지 못했던 적이 있잖아요? 

불러 놓고 일부러 욕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느 여인이 귀한 향유를 부어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가장 좋은 옷을 입히라”고 하는 것은 최고 귀한 손님으로 대우한다는 말입 니다. 


2) 손에 가락지를 끼우는 것은 상속자란 의미입니다. 

당시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것은 상속자로 삼는다는 표시였습니다. 

그 반지에 도장이 새겨져 있어서, 반지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벤허 영화에 보면, 노예로 팔렸던 벤허가 로마 귀족의 양자가 되잖아요? 

그때 양부에게서 인장 반지를 받습니다.

지금 탕자도 아버지에게 반지를 받습니다. 

다시 상속자로 삼아준다는 표시입니다.


3) 신발도 아들의 표시입니다. 

당시 노예나 종들은 신발을 신지 못했습니다. 

오직 자유인만 신발을 신었습니다. 

그러니까, 탕자 말대로 품꾼이 되면, 신발을 못 신습니다.

그런데 신발을 신기는 것은 품꾼이 아니라, 아들로 회복시킨다는 또 다른 표시입니다.


4) 농경 사회에서 소는 아주 귀중한 재산이요, 농사의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송아지를 잡습니다. 

이제 곧 농사에 투입될 귀중한 재산을 잡아서 잔치합니다. 

아버지는 그만큼 탕자의 귀환이 기뻤습니다.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기뻐했습 니다.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이렇게 사랑하고,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아들로서 살 기회를 한 번 더 주었습니다. 

Second chance를 주었습니다. 


제가 구원받을 때 느꼈던 감격이 다시 생각납니다.

거지보다 탕자보다 더 비참한 상황이었던 저를 사랑해 주셨고, 품어주셨습니다.

그것도 아무 조건 없이.

만약 조건이 있었다면, 저는 하나도 해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저를 사랑해 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저는 제 자녀들에게 어떤 아버지인지 돌아봅니다. 

저는 별로 좋은 아버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큰 애는 이러이러해서 불만이고, 작은 애는 저러저러한 점이 마음에 안 듭니다.

제 욕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녀가 잘못했다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 욕심에 차지 않는다고, 불만하거나 지적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은 아낌없이 사랑을 표현해 주어야겠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백하고, 

너의 존재만으로도 기뻐한다는 걸 알려주고, 

나는 언제나 네 편이란 걸 알려 주어야겠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하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Brz-ONZ8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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